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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암살자 홍종우와 김옥균, 과연 누가 옳았는가

<조동문은 '한말 근대화과정에서 보부상의 조직과 역할'에 관한 논저를 발표해 왔다. 2002년 '한국근대사회와 보부상'으로 <월봉저작상>을 받았으며, 현재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에서 기록조사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조재곤/푸른역사

19세기 말 개화기의 조선이라는 시공간은 100년도 넘는 과거지만 지금도 끝없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거기서 시작된 개방과 자주(自主)의 갈등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외세가 발톱을 세우고 조선을 노리던 이 시기,왕권은 무기력했고 관료들은 비겁했다. 조정은 일본파,청나라파,러시아파 등으로 갈려 외세의 역학관계에 따라 출렁거렸고 어지럼증을 앓았다. 이같은 현실을 타개하고자 일단의 혁명가들이 등장한다. 개화사상으로 무장한 이들은 갑신정변(1894년)이라는 쿠데타에 자신들의 운명을 던진다. 그러나 거사는 ‘3일천하’로 끝난다.

일본으로 도피한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은 1994년 청나라 상하이의 한 호텔에서 암살당한다. 김옥균의 몸에 3발의 총탄을 박아 넣은 이는 조선인 홍종우였다. 종래의 역사는 김옥균을 ‘근대화의 선각자’로 평가하되 홍종우를 ‘근대화를 가로막은 수구파’로 규정했다. 19세기 말 조선 내부의 갈등을 개화파와 척사파의 양자구도로 보던 관점에서 이같은 평가는 당연시 되어왔다.

그러나 홍종우가 왜 김옥균을 쏘았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해 나간 이 책은 홍종우를 개화파의 일원으로 편입시킨다. 그리고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을 개화파와 척사파의 갈등이 아니라 개화파 내부의 갈등으로 본다. 김옥균이 외세의존적 근대화를 추구했다면,홍종우는 자주적 근대화를 지향했다. 개화기 조선의 갈등양상을 이분법으로만 보던 우리들에게 이 책은 또 하나의 갈등축을 제시하며,그 새로운 축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홍종우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다.

홍종우는 김옥균에 비해서 덜 알려졌다. 명문가의 자제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김옥균과는 달리 홍종우는 벽촌의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개화사상에 눈뜨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90년 프랑스로 건너가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 된다. 그로부터 3년에 체류하면서 그는 볼테르의 사상을 흡수하며 근대화의 열망을 키워갔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근대화는 김옥균과는 방법을 달리 했다.

둘의 차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있다. 김옥균이 일본 망명 시절,단발을 하고 이와다 슈사쿠로 개명한데 반해 홍종우는 파리 체류 시절 늘 한복을 입고 다녔다. 김옥균은 일본을 조선의 나아갈 모델로 보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서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었으나,홍종우는 서구 문명을 익히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의 야심을 경계했다.

둘 사이의 이같은 차이가 과연 암살이라는 극단적 결과를 가져올만큼 심각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책의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다만 주체적 근대화를 위해서 왕권 강화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홍종우의 눈에 일본을 끌어들여 왕권을 뒤집으려고 노리는 김옥균의 존재가 위협적이었을 거라는 점은 분명하다. 외세의존적 개화파에 대한 홍종우의 시각이 어떠했는지는 후에 보부상 조직을 이용해 개화파의 근거지였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폭력적으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김옥균 암살사건에서 출발하는 이 책은 격랑의 개화기를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아간 두 지식인,김옥균과 홍종우의 일생을 흥미롭게 복원해냈으며,각각 개화파와 자주파를 대표하는 두 인물의 삶과 생각을 교차시키며 당시 조선의 고민을 엿보게 한다. 둘 중 누가 옳았는가?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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