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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교 정책에 이토 히로부미가 보인다 / 한상일(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이토, 외교·내정 서서히 장악… 어려움 없는 한국 병합 노려
英의 이집트 통치정책도 공부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한상일 지음|까치|460쪽|3만원

일본 정치 전공인 한상일(74) 국민대 명예교수는 "이토 히로부미는 평생 연구 대상이었다"고 했다. 1974년 미국 클레어먼트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당초엔 이토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쓰려고 했다. 세계적 일본학자인 지도교수 피터 듀스는 "이토는 자료가 방대하다. 평생 공부로 남겨두라"고 조언했다. 신간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은 40년 기다린 연구 결과인 셈이다. 한 교수는 "자료는 계속 모았다. 정년 후 쓰기 시작해 6년 정도 걸렸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이토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일본에서는 메이지(明治) 원훈(元勳), 우리에게는 침략의 원흉(元兇)이다.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이토가 한국을 침략하려고 한 게 아니라 문명화하려고 했다고 주장하는 황당한 연구가 나오고 있다. 이토는 한국을 근대국가로 만들려고 했는데 한국인들이 반일활동을 벌이는 등 이토의 '진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결국 병합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해괴한 주장이다. 한 교수는 "이토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통감으로 부임해 병탄 정책을 진행하면서 한일 관계가 비틀어졌다"면서 "비뚤어진 한일 관계의 시발점은 이토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이토는 겉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내세웠다.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직후에도 이토는 내외신 기자를 모아 놓고 "한국은 전과 같이 한국의 황제, 정부의 손안에 있습니다. 새로운 관계는 다만 한국의 복지와 권위를 증진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도록 보조할 뿐"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토는 처음부터 병탄(倂呑)을 노리고 있었다. 당대 정치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나 가쓰라 다로가 '즉각 병합'을 주장한 것과는 달리 이토는 '어려움 없는 병합'이 목표였을 뿐이다. 이토는 "지금 한국을 합병할 수 있지만 너무 급하게 처리하면 뒤에 어려움이 남게 되고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이토와 한국 병탄에 대해 논의한 오가와 헤이키치는 이토의 방식을 '말려 죽이기 정책'이라고 표현했다.

 

 

이토는 한국 병탄 정책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일본 군대가 궁궐 안팎을 포위하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고종에게 "조약을 거부할 경우 한층 더 불리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며 을사늑약을 강제했다. 통감 부임 후 외교만이 아니라 '시정 개선'이라며 내정(內政)을 장악했다. 한국 황실을 보호한다는 허울로 경찰권을 빼앗고, 근대 재판제도를 확립한다는 이유로 사법권을 장악하는 식이었다. 이토는 "한국도 병력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공언한 이틀 뒤에 군대 해산을 단행하기도 했다. 헤이그 밀사 사건 직후 "협약 위반이다. 일본은 한국에 전쟁을 선포할 이유가 된다"고 협박하면서 고종을 퇴위시켰다. 대외적으로는 이미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 조약 등을 통해 한국 지배에 대한 영국·미국·러시아의 동의를 얻은 상태였다.

이토는 의병을 무차별 학살하는 등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메이지 덴노에게 군대 통수권을 요청해 이를 받았다. 1907년 정미 7조약 이후 병탄 때까지 의병투쟁으로 사망한 한국인은 1만7688명에 이른다. 한 교수는 "이토가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 병탄을 부인한 것은 한국인을 안심시키고 국제적 관심을 돌리려는 정치적 수사였다"면서 "이토는 젊은 날 살인을 서슴지 않았던 것처럼 과단성·폭력성·추진력으로 한국의 외교권·행정권·경찰권·사법권을 차례로 빼앗고 한국 군대를 해산하면서 병탄의 걸림돌을 제거했다"고 말했다.

 

일본으로서도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일은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이토는 한국 병탄을 위해 영국의 이집트 통치 정책을 철저히 연구했다. 한 교수는 "기존 연구에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토는 이집트를 통치한 영국 정치인 크로머의 정략을 연구하고 원용했다"고 말했다. 미국 외교관 스티븐스는 이토에게 "크로머가 이집트 국정을 감독했던 정신과 방법을 모방하라"고 조언했다.

이토가 한국을 병탄하기 위해 노력한 과정을 읽다 보면 등골이 서늘하다. 과거 침략을 시인하는 듯하다가 부인하고, 미·일동맹 강화 등 대외 관계를 든든히 다지고 있는 현 일본의 모습은 강온 전략을 적절히 구사했던 이토를 철저히 연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개화기 권력자인 대원군, 김옥균 같은 개화세력, 전봉준 등 민중 세력이 무릎을 맞대고 조선의 앞길을 논의한 적이 없었어요. 이 세력들을 통합하는 리더십이 우리에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철저한 사례 연구를 바탕으로 적절한 외교 전략을 펴고 있는 것인가.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5/04/20150504018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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