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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조용필 재킷, 소방차 승마바지…8090 패션을 만든 '장쌤' / 장광효(장식미술학과 76) 동문

1세대 남성복 디자이너 장광효

옷은 개성의 표현이다. 예나 지금이나 옷에 대한 관심은 높았다.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의 역할도 중요했다. 디자이너 장광효(59)는 30년 동안 옷을 만들었다. 천편일률적인 무채색의 남성복에 컬러와 디자인을 입혔다. 국내 남성복 디자이너 최초로 파리컬렉션에 참가했다. ‘디자이너의 품위를 해친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홈쇼핑에 진출했고, 성공했다. 1992년부터 매년 2회 이상 패션쇼에 참가하며 꾸준히 자신만의 런웨이를 걸어가고 있다.


명동서 멋을, 이태원서 매너를 배웠다

“또래 친구들 노는 데 관심이 없었어요. 소공로 신세계백화점이 어린 시절 내 놀이터였죠. 백화점에 가서 사람들 보고 옷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남대문시장 지하 구제 상가도 자주 갔고요.”

엄마가 사다 주는 옷을 입는 또래 남자아이들과 달리 그는 자신의 옷을 직접 골랐다. 손수 만들어 입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땐 영화 ‘닥터 지바고’ 속 주인공이 입은 카키색 밀리터리 코트가 맘에 들어 남대문시장에서 구제 옷을 사다가 염색을 해서 입었다. 당시 남대문시장 수입상가에서 최무룡·신성일·김지미·남정임 같은 당대 유명 배우들과 종종 마주쳤다. 외국 잡지는 훌륭한 교재였다. 명동 중국대사관 근처 서점에서 파는 미국·일본 잡지들을 보며 스타일을 익혔다.

본격적으로 의상을 공부하기 시작한 건 대학 때다. 이태원과 명동에 많이 다녔다. 1976년 국민대 1학년 때 조형론을 강의하던 당시 김수근 교수가 “디자이너가 되려면 좋은 곳에서 먹고 좋은 곳을 많이 봐야 한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당시 명동엔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매장이 많았고, 이태원엔 고급 레스토랑이 많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멋을 부리는지, 매너는 어떤지 꼼꼼하게 살폈다. 이때 눈으로 보고 익힌 것들이 8년 후 본격적인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에게 훌륭한 자양분이 됐다.


다니던 직장 부도나 시작한 ‘카루소’

 

“남들이 안 가는 길 가려” 남성복 디자인
조용필 무대의상 시작으로 연예인 줄 서
붐붐·서태지·듀스 등 가수, 배우 안성기도


80년대는 패션이 크게 성장한 시대다. 70년대 경제 성장이 그 바탕이 됐다. 다양한 스타일의 옷들이 등장했고, 남성복도 발전했다. 대학원 졸업 후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장씨는 83년 남성복 브랜드 ‘캠브리지’에 입사했다. 당시 여성복 분야에선 앙드레김·진태옥 같은 디자이너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프랑스 유학 당시 옷 잘 입는 남자들을 만나면서 ‘어둡고 칙칙한 양복만 입는 한국 남자들에게 멋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4년 후엔 여성복 브랜드 ‘논노’의 수석 디자이너가 됐다. 당시로선 많은 액수였던 월급 500만원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가 부도났다. 높은 연봉을 주고 그를 데려갈 회사는 없었다. “3개월 정도 쉬면서 집에 있었는데 꼭 새장 안에 갇힌 새 같더라고요. 그때 내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87년 9월 그는 지금의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자신의 매장 ‘카루소’를 열었다. 330㎡(100평) 규모의 가게 절반은 매장, 나머지 반은 사무실과 작업실로 사용했다. 문을 연 첫 달 매출은 650만원, 그 다음 달은 2000여만원을 기록했다. 몇 달 후엔 월 10억원어치를 팔았다. 4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임대해야 했다. 3년이 안 돼 백화점을 비롯해 전국에 30여 개의 매장을 오픈했다. ‘옷 잘 입는다’는 남자들은 그의 매장을 찾아왔다. “강남 지역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식에 우리 옷 안 입으면 못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소방차 승마바지가 점령한 80년대 클럽

카루소의 옷은 연예인에게도 인기였다. “어느 날 가게 앞에 외제차가 멈춰 서길래 나가봤더니 조용필씨가 내리더라고요. 팬으로서 좋아했던 터라 달려가 인사했더니 옷을 맞추러 왔다고 해요. 방송가에서 압구정동 가면 옷 잘하는 곳이 생겼다고 해서 왔다면서 일본 NHK무대에서 필요한 옷을 비롯해 10벌을 주문했죠.” 장광효는 조용필의 왜소한 체격을 보완하기 위해 한 치수 큰 사이즈로 옷을 만들었는데 옷을 입어 본 조용필이 무척 좋아했다. 조용필의 옷을 만든 곳으로 알려지면서 연예인들의 방문이 크게 늘었다. 가장 기억나는 건 87년 데뷔한 댄스 그룹 ‘소방차’다. 발라드 일색이었던 80년대 가요계에 소방차의 등장은 충격에 가까운 일이었다. 바지 밑단이 좁고 상단이 풍성한 승마바지는 당시 젊은이들의 필수품이었다. “소방차의 데뷔 전 기획사 관계자가 찾아와 댄스 그룹인데 춤추기 편하면서 신선한 멋이 풍기는 옷을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낸 게 승마바지였어요.” 당시 클럽에 가면 소방차가 입은 승마바지를 따라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붐붐,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같은 댄스 그룹과 안성기 등 배우들도 그를 찾았다.


한국 남성복 디자이너 최초로 파리 패션쇼

그는 93년 패션의 도시 프랑스 파리로 눈을 돌렸다. 93년 파리의상조합에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석 달여 만에 회원 가입을 승인한다는 회신을 받았고 이듬해 파리 프레타포르테 남성복 컬렉션에 참가했다. 한국 남성복 디자이너로서 컬렉션에 참가한 건 그가 처음이었다. 300년이 넘은 프랑스 백작의 고택에서 열린 그의 첫 번째 해외 쇼엔 당시 세계 최고의 톱 모델이었던 카메론·안드레아·마크 등이 참여했다. 가야국을 모티브로 순백색과 바랜 듯한 흰색, 아이보리색을 기본으로 한 옷을 선보였다. 쇼가 끝난 후 그가 무대에 오르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제 인생에서 가장 황홀했던 15분이었죠.” 그의 패션쇼 소식은 프랑스 현지와 국내 매체에도 크게 소개됐다. 현지에서는 ‘동양의 장 폴 고티에’라며 극찬했다. 쇼 직전까지만 해도 한국 디자이너를 보는 시선은 차가웠다. “당시 외국에선 한국을 못 사는 나라라고 생각했어요. 기죽지 않으려고 촌티 안 내려고 좋은 곳에 가고 매너에도 신경 썼죠.” 이후 6번 더 파리 무대에 올랐다.

해외 패션쇼에 나가는 건 모두 자비로 했다. 요즘은 외국 쇼에 참가한다고 하면 정부가 지원해 주지만 그때는 정부가 과소비 촉진 아니냐며 오히려 조사하던 때였다. 정부의 지원 같은 건 바랄 수도 없었다. “그래도 후배들이 해외에 진출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을 테니 후회는 안 해요.”

 


여성복만 있던 ‘서울패션위크’ 참여하다

10년 내내 승승장구했지만 위기가 찾아왔다. 97년 외환위기(IMF)가 닥치기 직전 지인에게 사업을 맡기고 국내외 패션쇼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지인이 재산을 빼돌려 도망을 갔다. 자신도 모르던 빚더미에 앉았다. 빚과 매장을 다 정리하고 반지하로 내몰렸다. “그나마 그때 바로 정리하길 다행이죠. 만약 그 상태로 외환위기까지 겪었으면 제힘으로 정리할 수 없었을 거예요.” 180명이 넘던 직원은 10명도 채 남지 않았다. 이후 2년이 넘게 그와 직원들은 반지하에서 생활했다. 월세가 밀려 전기가 끊겨 촛불을 켜고 바느질을 계속했다. 그렇게 힘든 시기에도 포기할 수 없던 게 바로 서울컬렉션, 지금의 서울패션위크다. 새 원단이 없어 예전에 사둔 원단을 재활용해서라도 쇼에 올랐다.

그는 서울컬렉션 시작부터 함께한 만큼 애착이 크다. “파리컬렉션에 참여하기 4년 전이었던 90년의 어느 날 선배 디자이너인 진태옥씨가 도쿄 컬렉션을 보러 가자고 해서 같이 갔어요. 꼼 데 가르송, 요지 야마모토의 패션쇼를 봤는데 첫 쇼를 보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오더군요. 옷이, 그리고 패션쇼가 이렇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한국에 돌아온 후 디자이너들이 모여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를 만들었다. 이들을 주축으로 이듬해 91년 지금 서울패션위크의 전신인 ‘스파 컬렉션’을 열었다. 첫해에는 여성복 디자이너만 참여했고 92년 장씨가 참여하며 남성복도 함께 무대에 올랐다. 2012년 서울시에 이관된 이후에도 지금까지 매년 2회씩 한 번도 거르지 않고 47번의 컬렉션에 참여했다. “지금도 쇼를 준비하면 설레요. 디자이너라면 쇼(컬렉션)을 포기해선 안 되죠. 나 하나쯤 빠져도 뭐가 어떠냐는 생각을 했다면 지금까지 서울컬렉션이 남아있지 못하겠죠.”


"시트콤 ‘프란체스카’ 출연 아내는 말렸죠”

디자이너라고 하면 떠오르는 도도한 이미지는 장광효와 거리가 멀다. 2005년 MBC TV 시트콤 ‘프란체스카’에 디자이너 ‘장쌤’ 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실제 그의 매장에서 촬영했다. “디자이너가 웃기는 시트콤에 출연해서는 안 된다”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출연했다. 호기심과 ‘재미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랄프 로렌과 조르지오 아르마니도 시트콤에 출연했다”는 말로 아내를 설득했다. 그의 어색한 연기는 웃음을 자아냈다. 처음엔 카메오로 1회 출연하는 계획이었는데 결국 방송이 끝날 때까지 8개월 동안 함께 했다. 패션을 모르던 사람들도 그를 알아보며 인사를 건넸다. 같은 해 열린 서울패션위크에서는 그의 쇼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가 지나가면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런웨이에 올라서면 환호가 끊이지 않았다.

2002년엔 홈쇼핑에 도전했다. 직접 홈쇼핑에 출연했는데 2시간의 방송에서 1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3년 동안 정장 홈쇼핑을 계속했다. 잘 팔릴 때는 1시간에 12억원어치를 팔았다. 방송 직전까지만 해도 “망한 디자이너들이나 출연하는 것”이라며 홈쇼핑을 폄하했지만 지금은 안 그렇다. “수입 브랜드가 국내에 상륙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홈쇼핑과 인터넷이 새로운 판로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의 성공을 지켜본 이들은 되레 “상품기획자(MD)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홈쇼핑의 성공은 매장을 접고 고군분투하던 디자이너 장광효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파리 패션쇼 “내 인생 가장 황홀했던 15분”
97년 지인이 재산 빼돌려 빚더미 앉기도
“디자이너 되려면 먼저 따뜻한 사람 되세요”

 

 

지휘자 금난새 옷 때문에 눈물지은 사연

수많은 사람이 디자이너 장광효의 옷을 입었다. 지휘자 금난새는 이 중에서도 가장 기억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10년 전쯤 금난새는 옷 한 벌을 들고 장씨의 매장을 찾았다. “옷을 보니 5년 전에 제가 만든 옷이더라고요. 안을 보니 완전히 다 해졌어요. 이 옷을 입고 얼마나 많은 지휘를 했는지 안감이 다 해졌는데 그걸 보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대중을 위해 수천 번 팔을 저어 지휘했다고 생각하니 감사했다. 그래서 새로 옷을 지어 한 벌 선물했다. “옷은 그런 거예요. 따뜻해야 하고 인간적이어야 하죠. 디자이너가 뭐예요. 의식주 중에 의를 만드는 사람이잖아요. 의식주는 인류 생존의 기본 조건이고요. 그런 디자이너가 편협하고 자기밖에 모르면 성공할 수 없죠. 무엇보다 따뜻해야 하고 인간관계가 좋아야죠.”

디자이너로서 30년을 보내온 그는 요즘 또 다른 꿈을 꾼다. 바로 의상박물관이다. 조선 말부터 현재까지의 남성복, 현대 디자이너가 만든 남성복 등을 모아 모든 사람이 보게 하는 것이다. “옷은 역사적인 가치도 큽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개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니까요. 구한말부터 역대 대통령의 옷, 디자이너 작품 등을 모아 역사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원문보기 : http://gangnam.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1824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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