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인! 국민인!!
[세계초대석] "법조인 직업 긍지 높아 … 그에 걸맞는 기품 끝까지 지켜야" / 정성진(법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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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충무로에 있는 정성진(78) 대법원 양형위원장의 개인 연구실 이름은 ‘청눌재(淸訥齋)’다. 마음은 맑고 말은 어눌하다는 뜻이다. 원래 말주변이 없어 ‘눌’ 자를 넣었다고 한다. 말은 청산유수이나 행동은 전혀 다른 모습을 경계하고자 하는 뜻이 아닐까.
법무부·검찰과 학계, 사법부를 두루 거친 법조계 원로로서 최근 사법부에서 벌어지는 사법행정권 남용 파문에 대한 의견부터 듣고 싶었다. 아쉽게도 그는 “(양형위원장으로서) 거기에 몸담고 있으며 입장을 밝히는 건 도리가 아니다”고 끝내 손사래를 쳤다. ―최근 제3회 ‘천고법치문화상’을 받았는데 어떤 상인가. “서울지검장, 대검찰청 차장검사 등을 지낸 송종의 전 법제처장이 퇴직 후 변호사로 개업하는 대신 농촌에 정착해 농산물 유통업으로 돈을 좀 벌었다. 그 돈을 공익적 활동에 쓰겠다며 ‘천고법치문화재단’을 만들고 해마다 법치주의 확립에 기여한 분을 뽑아 상을 준다. 1회는 정해창 전 법무부 장관, 2회는 이시윤 전 감사원장이 받았고 이번에 많이 부족한 제가 그렇게 사양했는데도 막무가내로 안겨 3회 상을 받게 됐다.” ―올해 출범 10년을 맞은 양형위의 성과를 꼽는다면.
“한국이 대륙법계 국가 중 양형위원회와 양형기준제를 가진 유일한 나라다. 법관이 아니고 국민이 포함된 양형위원들 의견을 들어 기준을 만든다. 무엇보다 양형의 예측 가능성이 높아져 변호사들이 좋아한다. 법에 ‘5년 이상 징역형에 처한다’고 돼 있으면 7년도, 10년도 선고할 수 있잖은가. 판사들도 양형이 형사재판에서 제일 큰 고민이다. 그런데 기준이 있으면 (형량 산정의) 범위를 줄여준다. 지난해 4월 위원장 취임 후 외국 사정을 살피고 왔다.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는 양형기준이 없다. 한국 얘기를 하니까 그 사람들이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더라.” ―양형 제도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미국과 비교해 상황은. “미국이 처음에는 양형기준을 강제로 적용했는데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이 났다. 지금은 주마다 다르고, 개별 법관 재량에 맡긴다. 판사들이 양형기준을 지키는 비율이 40∼50% 정도다. 한국 법관들은 지금 양형기준 준수율이 90% 이상이다. 상당히 성공적이다.” ―양형 준수율이 그렇게 높다면 ‘판결이 자동판매기처럼 기계적으로 나오는 것 아니냐’ 하는 지적도 가능할 텐데. “상당히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양형에 대한 판사들의 고민이 양형기준으로 줄어든다. 판사들이 고민할 자유를 빼앗은 결과(웃음)란 측면에서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재판 능률이 오르고 양형의 예측 가능성을 높인다는 장점이 크다.” ―조두순 사건 같은 성범죄나 강력사건은 ‘엄히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 압력이 엄청나다. 국민 법감정과 다소 거리가 있어도 양형기준을 지키는 게 옳다고 보나.
“지금도 우리 양형기준이 너무 국민 감정과 유리되었다 싶으면 바꾼다. 최근에 아동학대치사처럼 아동 복지를 위협하는 범죄들의 양형기준을 올렸다. 사회 현실을, 좀 완만하긴 하지만, 그래도 반영한다는 점은 대단히 긍정적이다.” ―범죄학 전문가들은 사형조차 범죄예방 효과가 거의 없다고 하는데. “엄벌만 갖고선 범죄예방이 안 된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오히려 죄를 짓고도 처벌을 안 받는 사람, 특혜받는 사람이 없어져야 한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엄벌보다는 ‘필벌’이 바람직하다.” ―양형위가 앞으로 중점을 둘 부분은 무엇인가. “양형위 설치·운영이 10년쯤 됐다. 한국 사회는 서양과 달리 유교 윤리를 앞세우면서 전통 위에 법치주의가 도입됐다. 윤리적·도덕적 측면을 법치주의적 접근보다 앞세우는 국민 사고가 여전히 있다. 향후 어느 시점에 가면 한국만의 법치문화와 양형 문제, 심층적으로 약간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것도 논의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양형기준이 있더라도 엉뚱한 판결이 나오면 판결 신뢰를 떨어뜨린다. “극히 예외적 문제라고 본다. 일부 판사의 실수를 기준으로 삼기에는….(웃음) 사표를 내든 징계를 하든, 아니면 상급심에서 고쳐지거나 하겠지. 지금 법관 가운데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요즘 젊은 판사들과 기성 판사 간에 괴리가 생긴다. 검찰과 법원에서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시각 차이를 어떻게 보는지. “논어에 ‘군자무본 본립이도생(君子務本 本立而道生)’, 근본에 힘쓰면 도는 저절로 생긴다고 했다. 사법부든 검찰이든 논란이 될 때, 신뢰가 붕괴될 때 근본에 충실한다면 도라는 것은 저절로 갖춰지는 것이 아니냐, 원칙에 충실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원칙론대로 하면 결국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 같다. “우리 역사와 관계가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 사실 법원·검찰이 권위에 굴복한 점이 있다. 뭐 재심을 통해 (시정)하고 자체 사과 성명도 내긴 했지만 아직도 좀 남아 있다. 이제 그런 데에서 벗어나 본래의 사법부 및 검찰 기능을 충실히 했으면 하는 게 국민이 바라는 바다. 또 그게 우리 법치문화의 올바른 정착과 확립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법의 관계는 어떤 게 바람직한가. “여야 타협으로 해결할 일에 법적 잣대를 들이대거나 정치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를 검찰에 고발한다거나 ‘특별검사로 제대로 해보자’, 이런 식으로 정치문제를 자꾸 법적 문제로 연결 또는 확대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정치문화가 법의 문화보다 더 후진적이기도 하다. 정치의 문제를 법적으로 끌고와 (사법부나 검찰에) 떠넘기는 폐습은 없어져야 한다. 법을 정치적·단기적 이익을 위해 악용 또는 남용하는 것도 없어져야 한다. 그분(수사 대상)이 국회 법사위원장이다, 또는 여당 중진이다, 이런 이유로 봐주는 건 없다고 믿지만, 앞으로도 그런 사례는 없어져야 하겠다.” ―사법행정권 남용 파문 수습과 관련해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조언을 한다면. “거기에 몸담고 있으면서 도리가 아니다, 대외적으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양해 바란다.” ―양형위원장 임기를 마친 뒤 계획은. “‘출즉유위 처즉유수(出卽有爲 處卽有守)’라고 한다. 나아가면 해야 할 일, 물러나면 지켜야 할 일이 각각 있다는 뜻이다. 그동안 검찰, 대학, 정부기구에서 세속적 일은 다했다. 이제 법률가로서 본분을 지키는 게 남은 일이다. 나는 변호사 개업을 못했다. 주변에서 ‘법무장관도 지낸 사람이 개업 안 한 것은 훌륭한 것’이라고들 한다. 처음엔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나이 들어 보니. 변호사라는 게 원래 공익적이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일이다. 변호사 하면 돈 버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좋은 법률적 기구다. 어려운 사람 위해 가방 들고 법정에서 한두 시간 기다린 적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법률가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든다. 또 검사로 25년을 지냈고 대학에 10년 있었다. 검찰과 권력의 관계, (대한민국 정부) 초기 검찰과 권력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려고 도서관에서 과거 자료도 많이 찾아보고 저술을 하려 했는데 못했다. 이제 내 나름대로 개인적으로라도 좀 기록을 해서, 체계적 연구서는 아니더라도, 후배나 가족들에게 (저술을) 남겨야 하겠다.” ―법조인의 길에 막 들어서려고 하는 젊은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은. “법조인은 직업에 대한 긍지가 비교적 높다. 긍지에 걸맞은 기품을 힘들더라도 끝까지 잘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류에 따라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것보다는 우리 전통적 사고와 법조인에 대한 존경심, 사회 지도자로서의 선비 등을 떠올리며 기품을 지키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싶다.”
출처: http://www.segye.com/newsView/201806120028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