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중앙선데이] 고려사의 재발견 태조 왕건 ⑦ 식민사관의 계략/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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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째, 차현(*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금강) 밖의 산과 땅은 모두 배역의 형세이며, 인심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래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면,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으면 국가를 변란케 할 것이다. 혹은 (고려에) 통합된 원한을 품고 국왕이 가는 길을 가로막아 난을 일으킬 것이다(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역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啣統合之怨 犯비生亂).” 이마니시는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 지역이 지금의 전라도 지방이라는 점을 전제로, 왕건이 나주 출신 부인의 소생을 태자(뒤에 혜종)로 삼은 사실을 들어 왕건이 8조와 같은 내용을 작성할 리 없다고 했다. 지금의 장흥 출신인 정안(定安) 임씨(任氏)가 인종과 의종의 외척인 사실과 최지몽·유방헌·김심언·전공지 등 이 지역 출신 인물이 고려 전기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점도 그 근거라고 주장했다. 이마니시는 “태조의 훈요십조는 병란으로 소실되었는데, 최제안(崔齊安)이 최항의 집에서 그것을 얻어 임금에게 바쳐 세상에 전해졌다”(『고려사』권98 최제안 열전)는 기록을 근거로, 최항의 집에서 발견된 훈요십조는 최항의 작품이라 했다. 금지 대상은 특정지역 아닌 反통합 인물 최항은 최언휘의 손자이다. 최언휘는 경주 출신으로 당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급제한 뒤 귀국했다. 당시 중요 기록은 모두 최언휘의 손을 거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왕건의 핵심 참모였다. 또한 최항은 태조에서 목종까지 일곱 국왕의 실록인 7대 실록의 편찬 책임자였다. 이 7대 실록은 1011년(현종1) 거란의 침략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이 최항이 경주 출신의 신라계 인물로서, 후백제에 대한 나쁜 감정 때문에 훈요십조를 조작했는데, 당시 실록 편찬자가 최항의 가짜 훈요십조를 태조의 것으로 잘못 알고 역사책에 기록했다는 게 이마니시의 주장이다.
그러나 최항의 훈요십조 조작 여부를 떠나 등용 금지 지역을 전라도로 본 이마니시의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주장을 받아들여 위작설을 제기했다. 성호 이익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8조는 지역차별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 출처 : 중앙선데이 기사보도 2013.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