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중앙선데이] 송·거란·여진 사이 줄타기 외교 … 103년 만에 보주 탈환/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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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년(예종 12) 3월, 금나라의 공격에 쫓긴 거란이 보주성에서 철수한다. 고려는 마침내 보주성을 고려 영토로 편입하고, 보주를 의주(義州)로 명칭을 고친다. 1014년 이래 103년 동안 고려가 기울인 적공(積功)이 백년 영토분쟁을 종결시킨 것이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국왕 예종에게 올린 신하들의 글은 감격에 겨워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1038년(정종 5) 거란과의 타협으로 소강상태였던 보주성 문제가 문종 때 다시 불거진 것이다. 고려가 보주성 탈환을 위해 군사적 공세를 취했던 덕종 때와 달리 이번엔 거란이 보주성을 거점으로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이 사실은 1055년(문종 9) 7월 고려가 거란의 동경유수에게 보낸 항의문서에서 확인된다. “고려는 기자의 나라를 이어받아 압록강을 경계선으로 삼았다. 전 태후(前 太后:거란 성종의 모후)께서도 압록강을 경계로 삼게 했는데, 귀국(거란)은 우리 영토에 들어와서 다리를 놓고 성을 설치했다. 요즘엔 보주성에 군사시설을 증강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놀라게 했다. 황제(거란 왕)에게 보고하여 귀국이 설치한 다리와 보주성의 군사시설을 철거하여 영토를 우리에게 반환해 주기 바란다.”(『고려사』 권7) 한 해 전(1054년) 7월 거란이 보주성에 신설한 군사시설 철거와 영토 반환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1038년(정종 5) 타협을 본 보주성 문제가 거란의 군사시설 증강으로 16년 만에 다시 분쟁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이듬해(1056년) 거란은 보주성 일대에서 농경지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거란의 도발을 무력화하기 위해 고려가 선택한 수단은 외교 전략이었다. 1071년(문종 25) 3월 고려는 송나라와 50년 만에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두 나라의 연합을 가장 꺼려 하는 거란의 약점을 노린 것이었다. 1004년 거란과의 영토전쟁에서 패해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치욕을 당해 온 송나라는 신종(神宗: 1068~1085년 재위) 때 신법당(新法党:신종의 후원 아래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신법(新法)’으로 혁신정치를 편 왕안석을 지지한 정파)이 집권한다. 신법당은 거란을 제압하기 위해 그 배후의 고려와 연합한다는 이른바 ‘연려제요(聯麗制遼)’의 외교전략을 수립한다. 고려는 송나라의 이런 의도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외교관계를 재개한 두 나라는 이후 유례가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교류한다. 송나라와 거란의 대립을 적절하게 이용해 영토분쟁을 유리하게 이끈 고려식 등거리 실리외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고려와 송나라의 외교관계 재개로 군사시설 증강 같은 무력시위가 실익이 없다는 사실을 안 거란은 보주의 영유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 일대에 무역장을 설치하는 정책으로 선회한다. 고려에 대한 거란의 무역장 설치 요구는 선종(1084∼1094년 재위) 때 본격화한다. 보주는 한반도와 대륙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자, 압록강 일대의 교역 중심지였다. 거란은 보주의 교역권을 장악해 이익을 챙기는 한편으로 그 영유권을 영구화하려 했던 것이다. 고려가 무역장 설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다. “거란이 각장(榷場:무역장)을 압록강 언덕에 설치할 것을 의논하자, 이를 알아챈 고려는 중추원 부사 이안(李顔)으로 하여금 대장경을 분향하는 임무를 진 것처럼 가장하게 해 귀주(龜州)에 보냈다. 몰래 변방의 일(*전쟁)에 대비하게 했다.”(『고려사』 권10) 1088년(선종) 2월의 일이다. 고려는 강동 6성 가운데 최고 요새인 귀주성에 군사를 파견한다. 전쟁을 각오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어 이해 9월 고려는 사신을 거란에 보내 무역장 철회를 요구한다. 전쟁 각오한 항의로 무역장 철회시켜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1023 출처 : 중앙선데이 기사보도 2013.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