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중앙SUNDAY] 반란과 정변의 불씨 남긴 여진 정벌 책임론/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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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 숙종의 상을 마친 예종은 1107년(예종2) 12월 17만의 군사로 2차 여진 정벌을 단행한다. 1104년(숙종9) 1차 여진 정벌이 실패한 지 3년 만이었다. 넉 달 만인 이듬해 3월 정벌지역에 9성(城)을 쌓았다. 사령관 윤관(尹瓘)이 이끈 정벌은 한마디로 파죽지세였다. 윤관은 휘하의 임언(林彦)을 시켜 9성 중 하나인 영주(英州)성 남쪽 청사에 정벌의 공을 기리는 글을 쓰게 했다. 여진의 반격을 예상해 9성 수축을 반대한 의견도 있었다. 정벌에 참여한 병마부사 박경작은 윤관에게 ‘무공을 떨쳤으니 군사를 거두어 만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오랑캐 땅 깊숙한 곳에 성(*9성)을 쌓는 일은 쉽지만, 지키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윤관은 이를 무시하고 9성을 쌓았다. 그 후유증은 실로 컸다. “처음 조정에선 병목[甁項] 지역을 빼앗아 방어하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빼앗고 보니 이곳엔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여진의 공세에도) 9성이 험하고 견고해 좀처럼 함락되진 않았지만 전투에서 아군은 많이 희생되었다.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고 계곡과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 적들이 복병을 두어 성과 성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군사를 징발하자 온 나라가 소란해졌고, 기근과 역병으로 원망이 일어났다.”(『고려사』 권96 윤관 열전) 위 기록과 같이 여진 지역 깊숙한 곳에 쌓은 9성은 실제로 여진의 표적이 되었다. 더욱이 성과 성 사이의 거리가 멀어 방어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정벌에 따른 군사 징발에다 기근·역병까지 겹쳐 온 나라가 소란할 정도로 민심이 동요했다. 여진의 군사는 윤관이 귀환한 직후인 이 해(1108년) 4월부터 한 달간 9성의 하나인 웅주(雄州)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등 전면 공세를 취한다. 이 해 5월엔 부사령관 오연총이, 7월엔 사령관 윤관이 다시 출정한다. 많은 역사서가 9성 수축을 여진 정벌의 성과로 기록한 것은 편향적이다. 여진 정벌 후 9성 수축까진 4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후 9성을 반환한 이듬해(1109년) 7월까지 1년간 여진의 일방적인 공세에 시달린다. 9성 수축이 패전을 자초한 셈이 되었다. 9성 반환 직전인 이 해(1109년) 6월부터 사령관 윤관에게 패군(敗軍)의 죄를 묻는 처벌론이 제기된다. 9성 반환론도 동시에 제기된다. 대부분의 관료집단이 처벌론과 반환론에 동의한다. “김인존은 ‘토지는 백성의 삶의 터전입니다. 지금 성을 서로 빼앗으며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땅을 돌려주어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契丹)과 틈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었다. ‘정벌 지역은 우리 땅이고 백성도 우리 땅이라고 정벌의 이유를 거란에 통보했는데, 거란이 조사해 사실이 아닌 것이 드러나면 거란과의 외교 마찰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북쪽의 거란과 함께 9성 설치로 동쪽의 여진을 동시에 방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결코 나라에 복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고려사』 권96 김인존 열전) 고위 관료들, 윤관 처벌 요구하며 출근 거부 출처 : 중앙SUNDAY 기사보도 2013.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