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중앙SUNDAY]고려, 금나라 ‘신하’로 전락 … 묘청의 난 불씨 되다/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
---|---|---|---|---|---|---|---|
역사 속에서 권력은 언제나 현실주의자의 몫이었다. 이상주의자에게 권력은 아침 햇살 앞의 이슬에 불과했다. 현실정치의 작동 원리를 제대로 읽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다. 거란에게 당한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시도한 송(宋)나라의 왕안석이나 현실정치의 개혁을 추진한 고려의 숙종과 윤관이 그런 존재였다. 여진 정벌 실패와 윤관의 사망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예종은 이자겸(李資謙)의 딸을 비로 맞아들인다. 그 돌파구로 당대 최고의 문벌인 인주(仁州; 지금의 인천) 이씨와 다시 손을 잡은 것이다. “왕(*문종)은 이자연(李子淵)의 딸을 비로 삼고, 그에게 (최고 명예직인) 수태위(*정1품)라는 벼슬을 내렸다. …… (이자연은) 뒷날 문종의 공신으로 문종의 신주와 합사(合祀)되었다. 아들도 모두 고위직에 올랐다. 이호(李顥)는 경원백(慶源伯)의 작위를 받았다. 이정(李頲)은 문하시중(*종1품), 이의(李顗)와 이전(李顓)도 모두 재상(*2품 이상)을 역임했다. 세 딸은 모두 문종의 비가 되었다. ……이자겸은 이호(李顥)의 아들이다.”(『고려사』 권95 이자연 열전) 위 기록과 같이 이자겸의 조부인 이자연 때 그의 세 딸이 문종의 비가 되면서, 인주 이씨는 왕실의 외척 가문이 된다. 아들도 작위를 받거나 재상이 되었다. 문종 이후 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까지, 숙종을 뺀 다른 국왕들은 모두 이자연 때부터 손자 이자겸 때까지 3대에 걸쳐 이 집안의 딸들을 왕비로 맞는다. 이 집안과 고려왕실 간의 인연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 문종의 모후는 안산 김은부(金殷傅)의 딸이다. 고려왕실 초기에 ‘백년 근친혼’의 관행을 깨고 처음 맞이한 이성(異姓) 후비였다. 김은부는 이자연의 조부 이허겸(李許謙)의 사위이다. 이허겸 때부터 인주 이씨는 이미 명문가 반열에 올라섰다. ‘가문의 영광’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예종은 이자겸을 외척으로 삼아 자신의 왕권을 보장받았지만, 부왕 숙종을 위한 정치는 포기해야 했다. 나아가 신법에 반대한 문벌귀족세력이 정치적으로 득세하고 뒷날 외척이 발호하는 길을 터주는 실책을 저지른다. 정치 주도권을 장악한 김인존·고영신·최계방 등 유교 문신 귀족세력은 당장 숙종과 예종이 시도해온 신법에 반대한다.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이 모두 갖추어 있는데, 떠들썩하게 (신법으로) 고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성헌을 지키고, 그것을 잃지 않는 것만이 가능합니다.”(『고려사』 권97 고영신 열전) “공은 정사를 처리하면서 조상의 법을 함부로 고치거나, 새로운 법(*新法)을 만들어 풍속을 동요시키는 것도 기꺼워하지 않았다.”(「최사추(崔思諏) 묘지명」) 곽상(郭尙)은 윤관이 화폐유통정책을 시행하려 하자, 풍속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고 반대했다(『고려사』 권97 곽상 열전). 이미 만들어진 법을 따르면 될 일이지, 굳이 새로운 법을 만들어 풍속을 동요시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신법으로 불린 숙종의 부국강병책은 화폐 유통과 여러 형태의 조세를 신설해 재정을 확대하고, 확보된 재원으로 이민족 정벌과 같은 대외 팽창책을 펼쳐 왕권을 강화하려는 외치론(外治論)이었다. 반면 관료집단은 지배층의 도덕적 각성과 민생 안정에 중점을 둔 내치론(內治論)을 내세웠다. 예종은 내치론자와 타협한다. 이자겸, 측근에게 피살 … ‘석 달 천하’ 종지부 출처 : 중앙SUNDAY 기사보도 2013.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