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중앙sunday] 하층민들 신분 상승 봇물 … 재상 반열 오르기도/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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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 역사가 안확(安廓)은 『조선문명사』(1923년)에서 고려의 ‘귀족정치시대’를 움직인 세 집단은 승려, 무신, 폐신(嬖臣)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폐신이란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정치를 주도한 세력을 말한다. ‘폐신’은 국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는 뜻이며, 폐행(嬖倖)이라 부른다. 이들의 행적을 따로 기록한 것이 『고려사』 폐행 열전(권123)이다 고려 건국 때 반기 든 지역 주민 차별 박구와 유청신이 재상 반열에 오른 것처럼 원 간섭기에 부곡인들을 속박했던 규제는 상당 부분 무력화됐다. 나아가 유청신의 출신지 고이부곡은 고흥현으로 승격되었다. 지배층 진입에 만족하지 않고, 출신지를 현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박구·유청신과 같이 고위직은 아니지만 원나라에서 환관·군인이 된 부곡인의 출신지가 군현으로 승격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1335년(충숙왕 4) 원나라에서 온 상호군·안자유 등은 고려 국왕에게 (원나라) 황후의 명령을 전했다. ‘영주(永州:경북 영천) 이지은소(利旨銀所)는 옛날엔 현이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나라 명령을 어겨 현을 없애고, 주민은 은을 세금으로 바치는 은소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이곳 출신 나수(那壽)와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어려서 (원나라) 궁궐에 근무해 공을 세웠으니, 그들 고향을 다시 현으로 승격하라’라고 했다.”(『졸고천백』 권2 영주이지은소승위현비(永州利旨銀所陞爲縣碑)) 원나라 환관으로 활약한 나수 등의 요청에 따라 이지은소가 현으로 승격됐는데 이 사실을 기념해 당대 최고 문장가 최해(崔瀣)가 지은 비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부곡 지역을 군현으로 승격시키려 했을까? 현으로 승격되면 이지은소 주민들이 은을 채취해 국가에 바치는 고된 역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곡의 해체는 국가 수취와 재정 제도의 해체로 이어질 수 있는 큰 변화를 낳았다. 스스로의 신분 변화에 만족하지 않고 부곡인은 출신지를 군현으로 승격시켜 출신지 주민들의 부담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다음의 기록도 부곡 집단의 해체가 하나의 대세였음을 알려준다. “충렬왕 때 가야향(加也鄕) 출신으로 군인이 된 김인궤(金仁軌)가 공을 세워 그의 고향이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 때 경화옹주(敬和翁主)의 고향 덕산(德山)부곡은 재산현(才山縣)이 되었다. 충혜왕 때 환관인 강금강(姜金剛)이 원나라에서 수고한 공으로 그의 고향 퇴관(退串)부곡이 나성현(柰城縣)으로 승격되었다.”(『고려사』 권57 지리2 안동도호부조) 지금의 안동에 소속된 부곡인들이 고려와 원나라에서 군인·옹주·환관 등으로 출세한 뒤 자신의 출신지를 군현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이다. 부곡인의 신분 변화에서 부곡집단의 해체에 이르는 과정을 잘 말해준다. 이런 변화가 왜 고려 후기에 집중됐던 것일까? 무신정권의 수탈, 부곡인과 하층민의 봉기, 몽골과의 전쟁, 원나라와의 교류 등으로 고려 후기사회는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부곡인은 그런 변화에 편승하여 계층 분화를 촉진시켰다. 계층 분화는 군현 승격 이후 부곡지역을 해체하는 현상으로 발전되었다. 왜 우리 역사는 이런 민초들의 역사에 무관심했을까? 원나라의 간섭과 지배층의 움직임에만 눈을 맞추어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아래로부터의 변화는 물론 역사의 다양한 모습을 놓치게 된다. 역사 공부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출처 : 중앙SUNDAY 기사보도 2013.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