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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몽골, 시기심 많고 잔인, 몽골과 형제맹약 뒤 안정 /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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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간섭기에 역사가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김공행군기’(金公行軍記:1325년)에서 김취려(金就礪·1172∼1234)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규보는 시기심이 많고 잔인한 몽골과의 형제맹약을 ‘어쩔 수 없이 맺은 것’이라 했다. 그는 다른 글에서 ‘심하도다, 달단(몽골을 지칭)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심지어 어리석고 엉큼함은 금수(禽獸)보다 심하다’(『동국이상국집』 권25 ‘대장경판각 군신(君臣) 기고문(祈告文)’)라고 표현했다. 백 년 사이에 몽골에 대한 인식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고려, 몽골제국 중 유일하게 국가 유지 1259년 쿠빌라이 집권기(1259∼1294), 최씨 정권 붕괴와 왕정 복고로 몽골과의 전쟁은 종식된다. 이로써 고려와 원나라(1260년 이후 몽골에서 원으로 국호 변경)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전개된다. 1273년 두 나라는 삼별초의 반란을 함께 진압한다. 1274년 충렬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면서 고려는 부마국(駙馬國:사위 나라)이 된다. 두 나라가 함께 두 차례(1274·1281년) 일본을 정벌하면서 긴밀한 관계로 접어든다. 즉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천자-제후국 관계로 바뀐 것이다. 그 대신 고려는 왕조의 정통성을 유지하려 했다. 새로운 관계의 전개는 역사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쿠빌라이 사후 즉위한 원나라 성종은 두 나라가 처음 관계를 맺은 시기를 고려에 묻는다. 고려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금나라 치하의 거란 출신) 금산(金山) 왕자가 태조 황제(칭기즈칸)의 명령을 듣지 않고, 국호를 ‘대요(大遼)’라 칭하고 자녀와 재물을 약탈하여 고려로 침입했다 쫓겨 강동성에 진을 쳤습니다. 조정(몽골)에서 합진(哈眞)과 찰자(札刺)를 보내 토벌했는데, 눈이 쌓이고 길이 험해 식량이 공급되지 못했습니다. 고왕(高王:고종)이 이를 듣고 조충(趙冲)과 김취려를 보내 군사와 식량을 공급하고, 그들을 함께 섬멸했습니다. 이제 76년이 되었습니다.”(『고려사』 권31 충렬왕 20년(1294) 5월) 고려는 거란족을 섬멸한 1218년(고종5)을 두 나라 관계가 시작된 원년으로 보았다. 원나라 무종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 노릇 하는 국가는 오직 삼한(三韓:고려)뿐이다. (삼한이) 선대(태조 칭기즈칸)에 귀부한 지 거의 백 년이 되었다. 아비가 땅을 일구었고, 자식이 기꺼이 다시 파종을 했다.”(『고려사』 권33 충선왕 2년(1310) 7월조) 1218년 형제맹약 이후 몽골제국의 천하에서 유일하게 고려는 백성과 사직을 유지한 국가라고 했다. 형제맹약은 두 나라가 천자-제후 관계를 맺어 고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백 년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4세기 초 두 나라 지배층이 공유한 역사 인식이었으며, 이후 두 나라 관계는 실제로 어느 때보다 돈독하게 유지되었다. 그럴 경우 형제맹약의 효력을 무력화시킨 1232년 이후 몽골과의 30년 전쟁은 의미 없는 역사가 된다.
원나라의 제후국을 자청한 충선왕 출처 : 중앙SUNDAY 기사보도 2013.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