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 조선시대 영남사람의 욕망을 키웠던 출세 길을 따라 걷다 / 김용진(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겸임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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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 길은 과거와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한양으로 가는 과거 길은 세 개 뿐이었다. 영주와 단양 사이에 있는 죽령(竹嶺)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지고, 영동과 김천 경계인 추풍령을 넘으면‘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떨어진다고 믿었다. 문경새재로 통하면 문경(聞慶) 즉, ‘경사를 듣게 된다.’하여 이곳을 넘었다고 한다. 굳이 지명과 연관시켜서까지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했던 이유는 과거에 급제해 입신양명하는 것이었다. 당시 과거급제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정구선은 ‘조선의 출세길, 장원급제’에서 이렇게 적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대과는 744회 실시되었고 급제자는 1만4620여 명이었다. 이 가운데 3년마다 치르는 정기시험인 식년시가 163회 실시 6063명 합격, 별시를 비롯한 부정기시험이 581회 실시 8557명이 합격했다.”고 한다. 과거 1회에 평균 19명 정도가 급제하였다. 요즘 국가공무원시험과 비교하면 과거급제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문경새재 길은 조선의 사회적정서가 투영된 곳으로 영남지역 사람들의 출세욕에 부응했던 길이다. 정치 길, 과거 길, 장사 길로서 힘들여 오르면 누구나 기회의 땅에 닫을 수 있는 공평한 길이었다. 환희와 좌절이라는 엇갈린 운명에서 고향 길마저 오던 길로 갈 수 없었던 비애의 길이기도 하였다.
- 선비도 장사치도 새재 길은 문경 아리랑 고개
- 민중의 애절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새재 길 돌탑
김용진 작가 경북문인협회 회원, 디자인학 박사 출처:http://www.h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65484 |




조선시대 하나의 길이 교통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길이 있다. 바로 문경새재 길이다. 문경새재는 말 그대로 새도 힘겹게 넘었다고 해서 새재라 하였다. 한자로 조령(鳥嶺)이라하였고, 새(新) 길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과거에는 억새가 무성해 초점(草岾)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지명에서 짐작 할 수 있듯이 좁고 험준한 새재 길은 어두워지면 혼자 넘을 수 없는 길이었다. 문경새재 길은 삼국시대부터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역사적 사실과 얽힌 여러 설화도 전해진다. 조선시대 한양을 가장 가깝게 잇는 여섯 대로의 체계를 정비하면서, 동래에서 가는 가장 빠른 한양 길로 개척되어 영남대로라 불려졌다. 로마 몰락은 잘 정비된 길이 한몫했듯이, 임진왜란으로 한양이 빠르게 함락된 원인도 길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 새재에 성을 쌓아 방비를 해야 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주력부대가 새재를 저항 없이 통과하면서 조선의 명장 신립은 탄금대에서 달천을 등지고 이들과 맞서 싸웠지만 대패하였다.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 길에 오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만약 신립이 문경새재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결전을 벌였다면 임진왜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을지 모른다. 혹독한 전쟁을 겪은 뒤 새재를 요충지로 설정하고 가장 먼저 세운 관문이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이다. 조곡관은 1594년 새재에서 가장 비좁고 산세가 험한 곳에 세워졌다. 숙종 때에는 새재 정상에 있는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이 세워졌고, 새재 초입에 있는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은 가장 늦게 세워진 관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