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통일시계 제작 참여 / 김철수(공업디자인)교수
휴대전화 대신 ‘통일시계’ 보세요


[기업, 氣uP! | (주)로만손]

침체에도 세련된 디자인으로 성장하는 로만손…개성공단 협동화공장 조성해 도약 꿈꾼다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시계산업의 적은 휴대전화?

1980년대까지 공급자 위주의 활황기를 타던 시계산업이 1990년대 후반부터 위축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휴대전화의 보급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휴대전화에 내장된 시계 기능 때문에 시각을 알리는 구실만 놓고 볼 때 전통적인 시계는 설 자리를 잃게 됐다는 것이다.


전체 직원 15% 연구개발 인력


국내 시계시장 규모(소비자시장 기준)는 대략 4천억원 정도인데, 휴대전화 보급과 최근의 내수침체로 올해는 3천억원에 머물 것으로 추정된다. 수출쪽도 별반 다르지 않다. 로만손, 오리엔트, 아동산업 등 상위 10개 업체의 수출이 2001년 1억1550만달러에 이르렀다가 2003년 6960만달러, 2004년 6600만달러로 쪼그라들었다. 이 또한 휴대전화 보급에 따른 영향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중에도 업계의 독보적인 1위인 로만손만은 꿋꿋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로만손의 매출은 2002년 410억원에서 2003년 379억원으로 주저앉았다가 지난해 411억원으로 회복했다. 수출도 2002년 2018만달러, 2003년 2402만달러, 2004년 2477만달러로 안정세를 이어가고 있다.



△ 개성공단의 로만손협동화공장은 올 6월 완공될 예정이다. 로만손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로만손 제공)


이는 로만손이 1988년 창업 때부터 나라 밖으로 눈을 돌린데다 디자인과 연구·개발(R&D)에 힘을 쏟은 덕으로 분석된다. 로만손은 전체 직원(160여명) 가운데 15%가량을 연구개발 인력으로 짜놓고 있으며, 내수·수출·지역별로 담당 디자이너를 키우고 있다. 지난해까지 11년 연속 우수디자인 상품(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선정된 것은 이런 바탕에서 비롯됐다.

봄볕 따사로운 4월21일, 서울 가락동 로만손 본사에서 만난 김기문(50) 사장은 시계산업을 사양업종인 양 여기는 풍토에 대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국의 도자기, 독일의 쌍둥이칼을 보세요. 전통산업도 얼마든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키울 수 있습니다. 시대 흐름의 뒤안길에 있는 아이템(업종)이라고 지레 안 될 것으로 치부해서는 곤란합니다.” 김 사장은 직원들과 어울리는 사석에서도 늘 “사양 기업은 있어도 사양 업종은 없다”며 “패션과 디자인에 주력하면 고정 시장은 늘 있는 법”이라고 강조한다.

자체적인 디자인의 패션시계로 세계 70여국에 수출길을 열어놓고 있는 로만손은 올 6월 또 한번 새로운 시험대에 오른다. 로만손과 9개 협력 업체가 손잡고 북한 개성공단에 건설 중인 ‘로만손협동화공장’이 완공돼 북한 거점 시대를 맞는 것이다. 올 1월 착공한 협동화공장은 현재 40~50%의 공사 진척률을 보이고 있다고 김 사장은 전했다. 로만손협동화공장은 면적 3천평에 근무인원 1천여명(예정)으로, 개성공단에 입주한 15개 업체 가운데 최대 규모다. 이 때문에 협동화공장은 개성공단의 상징으로 자주 거론된다.

로만손은 협동화공장에서 만드는 첫 제품 이름을 가칭 ‘통일시계’로 정해놓았다. 광복 60돌을 기념하고, 남북화해와 통일의 염원을 담자는 뜻에서다. 통일시계는 평화, 어울림 등 5개 정도의 메시지를 담은 시리즈 제품으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김 사장은 귀띔했다.


개성공단에서 통일시계 제작


△ 김기문 사장은 "디자인 경쟁력을 갖추면 전통사업도 얼마든지 육성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사진/ 류우종 기자)


통일시계 제작에서도 로만손이 가장 중시하는 점은 디자인이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수준급의 디자인자문단을 구성한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통일시계 자문단에는 김철호 한국디자인진흥원(KIDP) 원장, 유광섭 동서울대학 학장, 김철수 국민대 교수, 김현 디자인파크 대표, 박윤수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장, 변상태 홍익대 교수, 최명식 경희대 교수가 참여하고 있다. 이들 자문위원은 지금까지 두 차례의 회의를 연 데 이어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통일시계의 디자인 작업을 진행 중이다.

통일시계는 2만5천~3만개로 한정해 제작하고, 시계마다 고유번호를 붙여 소장가치를 높이기로 했다. 남북 관련 기관, 기업 등에서 받은 2만개의 사전 예약은 이미 끝났다. 나머지 5천~1만개는 롯데백화점과 이마트를 통해서만 판매될 예정이다. 유통업체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을 거친 결과다. 가격은 개당 5만~10만원대에 이를 것으로 알려졌다.

김기문 사장은 통일시계라는 이름에 걸맞게 뜻있는 행사를 구상 중이다. 통일시계 판매에서 얻는 이익금을 바탕으로 교육용 벽시계 5천 세트를 만들어 북한 내 4800여개 인민학교(초등학교)에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로만손은 이를 위해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쪽의 의사를 타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사장은 “통일시계 제작은 소비자들한테 의미 있는 제품을 만들어 욕구를 충족시켜주겠다는 것이며, 메인 비즈니스(주 사업)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통일시계는 상징적인 의미를 띨 뿐이고, 본격적인 사업은 그 다음 단계에서 펼친다는 방침이다. 이는 개성공단 협동화공장을 로만손 시계 생산의 주요 근거지로 삼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현재 로만손은 핵심 디자인, 마케팅 기능만 갖고 있을 뿐 생산은 모두 외부(아웃소싱)에 맡기고 있다. 이는 나이키와 비슷한 사업방식이라고 김 사장은 설명한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개성 협동화공장 건설은 로만손 시계 생산의 큰 축이 남한 지역에서 북한 개성공단으로 옮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김 사장은 “앞으로 3년 정도 계획을 잡고, 개성공장의 생산 비중을 90%까지 끌어올릴 방침”이라고 말했다.



△ 로만손협동화공장의 완공 뒤 모습을 그린 투시도. (사진/ 로만손 제공)

김 사장의 로만손이 개성공단 진출에 뜻을 둔 것은 3년 전쯤이라고 한다. 개성공단의 구상은 이미 제시돼 있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국내 시계산업을 둘러싼 환경은 크게 변하고 있었다. 내수 침체와 인건비 부담을 견디지 못한 국내 업체들은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잇따라 이전했다. 로만손 또한 중국 등지에서 사업을 벌였는데, 장기적으로 북한쪽과 손을 잡는 게 유리할 것이란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인건비가 중국과 비슷한데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였다.

“중국에서 사업을 해보니 무엇보다 말이 안 통해 힘들었습니다. 또 들어갈 당시와 달리 갖가지 상황이 바뀌기도 했고….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개성공단이 조성되면 기회를 잡을 수 있겠다 싶었지요. 국내 부품업체들 몇곳을 모아 같이 공장을 지으면 윈윈(상생)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컨소시엄을 구성하게 된 겁니다. 애초 참여한 협력업체가 5개였는데, 추가로 들어와 이제 9개로 늘었습니다.”


지난해 80억원 부실 정리


로만손은 올해 3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100년 전통의 시계·보석박람회(바젤월드) 명품관에 3년 연속으로 진출했다. 바젤월드 명품관에 들어가는 건 모든 시계·보석업체들의 꿈이다. 아시아권에서는 일본 세이코·시티즌과 한국의 로만손 등 3곳만 바젤월드 명품관에 진출한 기록을 갖고 있다. 시계산업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홍콩, 대만, 중국에선 이 명품관에 들어간 업체가 전무하다고 한다.

로만손은 지난해 80억원의 적자(당기순손실)를 냈다. 내실은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도산한 대리점에서 갚지 못한 장기 미수채권 등 80억원의 부실채권을 한꺼번에 떨어낸 투명성 강화 조처 때문이었다고 회사쪽은 밝혔다. 로만손은 부실을 정리한데다 개성공장 시대를 맞기 때문에 또 한번 크게 도약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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