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정치판 나비효과 / 김형준/ 국민대교수·정치학

[한겨레 2005-06-28 17:42]


6월 임시 국회가 끝나면 개혁과 상생을 외치며 요란스럽게 시작했던 17대 국회가 출범 1년을 마무리한다. ‘제2의 제헌국회’라고 불릴 정도로 온 국민의 기대를 모았던 17대 국회에 대한 평가는 최악이다. 한 조사 기관이 최근에 실시한 17대 국회 의정 활동 성적표는 100점 만점에 51점으로 낙제 점수이다.
개혁을 소리높이 외쳤지만 개악의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고 있을 뿐이다.

과거사법은 누더기 법으로 전락했고,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처리가 불투명하고, 작년 연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국가보안법은 법사위에 상정된 후 여야 누구도 거론하지 않는 ‘잊혀진 법안’이 된지 오래다. 핵심 개혁 입법은 장기간 표류하고 있지만 경제 회생의 명분으로 과거 분식회계 유예 등 재벌 옹호에는 여야가 화끈한 합의를 도출했다. 국회가 국민과의 개혁 약속을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 하니 택시를 타고 국회 의사당 앞으로 가자고 하는 의원에게 “개집으로 가느냐”고 되묻는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다. 혼탁한 개악의 물줄기는 국회를 넘어 정당을 오염시키고 있다. 비생산적인 정치를 지양하고 원내 정책정당 중심으로 간다는 취지로 창당하면서 폐지한 열린 우리당의 사무총장직이 부활되었다. 놀라운 것은 초대 사무총장에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의원이 버젓이 임명되었다. 한나라당도 혁신 위원회가 확정해서 발표한 혁신안의 핵심이 고작 대선 후보 선출에 대한 규정과 당 지도체제 문제 등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실소를 금치 못한다. 초보적인 개혁도 제대로 못하는 정당들이 감히 혁신을 들먹이고 있는 꼴이다.

왜 한국 정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개혁이 개악으로 변질되고, 비정상이 정상을 지배하며, 정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후진성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설명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국회, 정당 등의 정치 토양이 척박하기 때문에 아무리 정치개혁의 씨앗을 뿌리더라도 씨앗은 말라 비틀어 죽고 오로지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가설이다. 또 다른 가설은 한국 정치에는 정치 개혁 씨앗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씨앗 부재론’이다. 여야 기득권 정당들은 개혁에 대해 진검승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편의에 따라 개혁을 기피하고 있다. 왜 개혁을 해야 하고 무엇을 개혁할 지 근본에 대한 고민도 없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에는 어쩌면 두 가설이 다 옳은지 모른다. 정치토양도 척박하고 개혁 씨앗도 없다. 그렇다면 개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인가? 아니다. 정치 발전은 로또복권 당첨과 같이 갑작스럽고 소란스럽게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새벽처럼 소리 없이 천천히 찾아오는 것이다.

다만 정치 발전의 여명이 조금이라도 빠르게 비춰지기 위해서는 척박한 토양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하고 제대로 된 정치개혁의 맹아를 찾는 길이 현실적이고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정치개혁에 목숨을 걸고 진검승부를 할 수 있는 정치인이 나타날 수 있도록 국민들이 만들어 가야 한다. 아마존강의 보잘 것 없는 나비의 날개 짓이 지구 반대편에 엄청난 해일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나비효과의 핵심이다. 정치판에도 작고 미세한 변화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나비효과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 나비가 인물인지 제도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기존 정치권이 개혁을 거부하고 개악 메들리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한국 정치판 나비효과의 희생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김형준/ 국민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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