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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첫 소설집 '이로니, 이디시', 장편 '정크노트' 낸 명지현(중어중문 84)

신인 작가 명지현(43·사진)씨가 첫 소설집 <이로니, 이디시>와 첫 장편소설 <정크노트>를 동시에 펴냈다.

‘첫’이라는 풋풋한 관형사가 붙은 소설책 두 권을 갓 세상에 내놓은 신인이라지만, 명씨는 광고회사 카피라이터와 방송사 다큐멘터리 작가로 십수년을 일하다 3년 전 늦깎이로 소설가의 길에 들어섰다. 문예지에 줄곧 작품을 발표하고 있고, 머잖아 두 번째 장편 <김치 원더랜드>(가제)를 펴낸다 하니, 늦게 나온 만큼 심중에 내장한 이야기샘이 녹록잖은 듯 왕성한 필력을 과시하고 있다.

장편 <정크노트>(문학동네)는 한 남자아이의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우연히 한 농촌마을 언덕배기 빈집에 들어온 ‘약쟁이’ 전직 의사와 그 약쟁이 아저씨를 우연찮게 돕게 된 소년의 은밀하고도 수상쩍은 양귀비 재배의 기록인데, 그 양귀비꽃 키우기가 최종적으로 이들에게 선사하는 것은 결국은 삶의 한 국면의 교감이라 할 것이다.

마약중독으로 시시때때로 정신줄을 놓는 약쟁이 아저씨와 알코올중독에다 음주사고까지 쳐서 제 몸 하나 건사 못 하는 아버지, 밭일과 집안일까지 종종 손자에게 내맡기는 할머니까지. 조카에게 음식을 먹이려고 전전긍긍하는 큰어머니를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어른들이 다소 무책임하게 그려지는 것이 <정크노트>의 특색이다. 아편쟁이 아저씨를 비롯해 그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고작 중학교 2년생인 ‘나’의 몫이다. ‘나’가 보기에 어른들이란 아편이든 술이든 그 무엇엔가 ‘중독’된 이들이며, 그 중독의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한 이력과 무관하지 않은 듯 명씨의 소설들에는 다채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소설집 <이로니, 이디시>(문학동네)에는 8편의 단편이 묶였는데, 표제작은 구한말 독일인 양부모에게서 자란 샴쌍둥이 자매 이로니와 이디시의 삶의 한 국면을 쌍둥이의 몸종을 화자로 내세워 소묘한다. <그 속에 든 맛>은 인육으로 요리를 하는 식재료도매상 사장, <더티 와이프>는 피라미드 사기에 걸려 무일푼 신세가 된 뒤 공장지대 지하 방에 살며 쓰레기장에서 주운 실리콘 인형(=리얼 돌)과 몸을 섞는 남자, <손톱 밑 여린 지느러미>엔 목덜미에서 아가미가 돋아난 사내가 등장한다.

그 인물들을 그리는 작가 의식의 밑바닥에는 인생살이에 대한 씩씩한 태도 혹은 낙관이 깔려 있는 듯하다. <정크노트>에서 삶의 혹독한 고비에 놓인 소년은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집을 나간 어머니 부재의 상처도, 아편쟁이 아저씨의 위악스러움도 ‘양귀비 밭은 내 거야’라는 식의 생명력과 특유의 건들거림으로 씩씩하게 통과한다. 소년이 어른들에게 1년 노동의 소출인 아편을 넣은 찌개로 ‘보시’를 하는 결말은 그 어른들과의 화해의 만찬이 아닐는지.
그래서일까. 명씨의 주인공들은 좀처럼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설령 비극을 예감케 하는 파국의 순간이 있더라도 건너뛰어지거나 생략된다. 소설들은 파국 직전이나 파국의 시작점에서 멎어 있다. 그 순간의 어떤 희열 때문에라도 삶은 살 만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로니, 이디시>에서도 샴쌍둥이 이로니와 이디시의 ‘비극적 운명’이 예상되는 가운데서도(양부모는 연락이 오지 않고, 화자인 몸종마저도 이들을 떠나야 하고, 이들을 돌보며 남는다는 사모님의 태도도 석연찮은 가운데서도) 작가는 이 쌍둥이의 끈덕진, 혹은 원초적인 삶의 욕구를 포착하여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충천’(蟲天)이라는 흙을 먹고 사는, 반딧불이 비슷한 가상의 벌레를 소재로 삼은 <충천>에서 사발을 만드는 도예가는 벌레가 자신의 눈동자 안에 들어앉아 자라고 있어도, 그 벌레를 도려내기보다는, 그 벌레로 인한 실명을 감당코자 한다. 다만 “어서 나와라, 내 눈알 먹지 말고 흙을 먹어라” 하며 그 유충이 어서 부화하여, 바깥의 동료 벌레들과 함께 하늘을 날아오르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장편 <정크노트>에선 중학생 소년이 된장찌개에 아편을 풀어넣어도 어른들은 그저 그에 취해 곤히 잠들 뿐 어떤 파국은 일어나지 않는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아마도 삶의 한순간을 포착하는 그 자체인 듯하다. 후배와 바람을 피운 남자친구 때문에 속이 타는 젊은 처자를 내세운 <목표는 머리끄덩이> 역시도 남친에게 질척대지 않고 경쾌발랄하게 복수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발랄한 문체 때문일까. 절망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는 삶의 국면에 놓인 주인공들의 몸이 종종 지나치게 가벼워 보이기도 한다. 문장들은 뒤끝이 주는 긴장이 약하여, 이따금 새털처럼 휘발하기도 한다.

원문보기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74833.html

출처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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