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중앙선데이] 왕건, 변방 장수가 전쟁 영웅으로 … 궁예 이어 2인자/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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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년의 팔공산 전투가 후삼국 전쟁의 향방을 가른 육전(陸戰)의 대표적 전투라면, 나주전투는 당시 해전(海戰)의 대표였다. 903년부터 935년까지 왕건은 나주를 놓고 견훤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한 지역을 두고 이렇게 긴 공방을 벌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나주는 후삼국 전쟁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고려 건국 이전 왕건의 행적을 기록한 『고려사』 가운데 ‘태조 총서’의 대부분은 나주전투로 장식돼 있다. 하이라이트는 왕건이 고려국을 건국하기 8년 전인 910년의 전투다. ‘태조 총서’에 기록된 당시 전투상황은 다음과 같다. “(왕건의 군사가) 나주 포구에 이르자 견훤이 직접 군사를 인솔하고 전함을 벌려 놓았다. 목포에서 덕진포(德眞浦: 지금의 영암 해안)에
이르기까지 육지와 바다의 앞뒤 좌우로 배치된 군대의 위세가 대단했다.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자, 왕건은 ‘근심할 것 없다. 싸움에 이기는 것은
마음을 합하는 데 있지, 숫자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군사를 내어 급히 공격하자, 적의 군함이 뒤로 물러났다. 이때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지르자(乘風縱火),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500여 명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자, 견훤은 조그마한 배를 타고
도망쳤다. (생략) 견훤의 정예군을 꺾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다 안정되었다. 이에 삼한의 땅을 궁예가 태반이나 차지하였다.”
고려 개방정책을 잉태하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적벽대전에서 7일간 기도 끝에 불어 온 동남풍을 이용해 조조의 군사를 대파해 유비의 촉나라를 건국하는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2000년에 방영된 TV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드라마 작가는 왕건의 군사가 ‘바람을 이용해 (견훤의 배에) 불을 질렀다(乘風縱火)’는
‘태조 총서’의 기록에 착안해 왕건의 책사 태평(泰評)이란 자가 동남풍을 이용해 승리를 이끌었다고 극화했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한 통속 드라마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승리의 일등공신은 물론 왕건이지만, 그 뒤에는 또 다른 숨은 공신이 있다. 바다상인(海商)의 후예, 왕건
첫째 부인의 아버지는 정주 출신의 유천궁(柳天弓)이다. 정주는 예성강·임진강·한강이 합류하고, 강화도를 마주하는 황해 중부 해상 교역로의
중심지다. 왕건의 근거지 개경과 인접해 있다. 유천궁은 이곳을 근거지로 한 해상세력이다. 왕건은 909년과 914년 각각 2500명과
2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에서 출발하여 나주로 향한다. 914년 70여 척의 군함을 이곳에서 수리한다. 당시 정주는 왕건이 거느린 해군의
발진기지였다. 유천궁은 왕건의 군사에게 식량을 제공할 정도로 왕건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9684 출처 : 중앙일보 기사보도 2013.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