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중앙SUNDAY] 세 남자 섬긴 충선왕 숙비의 발원 담긴 수월관음도/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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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불화(佛畵)는 고려청자와 함께 한국 미술을 대표할 정도의 빼어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불화 약 160점은 대부분 원(元)나라 간섭기인 14세기 전반 50년 동안에 제작되었다. 지금부터 700년 전이다. 그중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불화는 흔히 말하는 탱화이다. 붙박이 벽화가 아니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실내에 봉안하거나 사찰 바깥의 야외 법회용인 괘불(掛佛)의 두 가지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원의 간섭을 받던 무렵 고려엔 새로운 지배층인 권문세족이 등장한다. 이들은 발복(發福)을 위해 불화를 제작해 특정 사찰이나 저택에 원당(願堂)을 지어 이를 안치했다. 불화는 이때부터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유홍준의 한국미술사2』, 2012). “착한 남자여, 남방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에 관자재(觀自在)라는 보살이 있다. 그대는 그를 찾아가 어떻게 보살의 행동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의 도리를 닦는지 여쭈어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노래를 읊었다. ‘성현들이 사는 바다 위의 산, 보물들로 장식된 지극히 깨끗한 곳, 꽃과 과일나무 숲이 우거진 곳, 샘물과 연못이 넘실대는 곳, 용맹장부 관자재보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 산에 있다. 그대는 가서 공덕을 물어라. 그대에게 큰 방향을 알려주리라.’ 그때 선재동자(善財童子)는 이 노래를 듣고 보살의 발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직하고 길을 떠났다…… 바위 골짜기 사이로 샘물이 흐르고, 울창한 숲에 보드라운 향내 나는 풀이 땅에 깔려 있는데, 관자재보살이 금강보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 보살은 ‘깨달음’, 즉 불교의 진리를 구하는 존재다.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수행자가 보살이다. 깨달음을 찾아 길을 나선 선재동자가 인도 남부 보타락가산에 가서 관음보살 앞에서 예배를 올리는 장면이 하나의 그림처럼 기록되어 있다. 이런 내용을 담은 불화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다. 달이 물에 비친 듯이 흰 천을 걸친 청정(淸淨)한 보살이란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고려 때 제작된 수월관음도 가운데 최고의 명품은 충선왕(1308~1313년 재위)의 비(妃)인 숙비(淑妃)의 발원으로 제작된 것이다. 길이 419.5cm, 너비 254.2cm(원래 크기 500cm, 너비 270cm)로 제작돼 현존 불화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크기 자체가 우선 다른 불화를 압도한다. 또한 현존 불화 가운데 최고의 예술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그림 속에 고려 불화의 아름다움과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그림 2 참조). 당대 최고의 화가 다섯 명이 제작 출처 : 중앙SUNDAY 기사보도 2013.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