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중앙SUNDAY] 천민 출신 권력자, 실권 넘어 왕권을 꿈꾸다/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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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918∼1392년)의 고려 역사에서 특이하게도 100년쯤은 무신정권(1170~1270년) 시대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역사가들은 ‘고려왕조 멸망의 계기는 무신정권 때부터’라고 혹평했다. ‘의종과 명종(무신정변) 이후 권세 가진 간사한 무리[權姦]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여 나라 근본을 깎고 상하게 하고 비용을 함부로 사용해 나라 창고가 텅 비었다’(『고려사』 권78 식화지 서문)는 식의 평가가 그렇다. 그렇지만 무신정권 붕괴 후 고려왕조는 120년이나 더 지속한다. 다양한 고려의 역사를 너무 단순화해 버렸다. 경주 출신인 이의민은 천민이었다. 아버지는 소금과 체를 파는 상인, 어머니는 사원의 비(婢)였다. 이의민은 8자나 되는 큰 키에다 힘이 세어 두 형들과 마을에서 횡포를 부리다 안렴사(조선의 관찰사 격) 김자양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두 형은 죽었으나 그만 살아남았다. 김자양은 그의 완력을 보고 경군(京軍:개경방어 군인)으로 선발했는데, 그것이 인생의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아버지 이선(李善)은 어린 아들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구층탑으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선 아들이 필시 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이의민은 경군에 선발되어 가족을 데리고 개경으로 가다 날이 저물어 개경 성문이 닫혀 성 밖 연수사라는 절에서 묵었다. 꿈에 긴 사다리가 성문에서 궁궐까지 걸려 있어 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부자(父子)의 꿈속에는 천민 신분을 벗어나려는 열망이 담겨 있다. 경군이 된 그는 타고난 완력으로 수박희(手搏戱:태권도의 일종)를 잘해 국왕 의종의 총애를 받아 단숨에 별장(別將:정7품 벼슬)으로 승진한다. 결정적인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다.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크게 공을 세워 장군(將軍:정4품)으로 승진한다. 장군은 1000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무반의 고위직이다.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본 무신정변이 그에게는 도약의 기회가 되었다. 1173년(명종3) 김보당(金甫當)이 주동한 의종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김보당의 명령을 받은 장순석 등이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을 경주로 모셔와 그를 구심점으로 무신정권을 타도하려 했다. 복위운동의 거점 지역을 경주로 택한 것은 옛 신라 수도라는 상징성에다 이곳의 반(反)왕조적인 정서를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 때 조위총의 난과 고구려 부흥운동, 의종 복위운동과 신라 부흥운동이 각각 서경과 경주에서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옛 삼국의 수도였던 두 지역은 고려 건국 후 개경 중심 정치에서 소외받았기 때문이다. 황룡사 구층탑에 올랐다거나, 개경 남문에서 궁궐로 사다리를 타고 넘어갔다는 이의민 부자의 꿈에는 고려왕조에 대한 경주인의 반감이 투영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 정중부는 복위운동 진압 사령관으로 경주 출신 이의민을 선택한다. 경주의 반왕조적인 정서를 역이용한 것이다. 그의 의도대로 경주민들은 이의민을 반기면서 반란 주동자를 단숨에 제압하고 의종을 경주 관아에 가두었다. “이의민은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가로 의종을 불러내어 술 몇 잔을 올리고, 그의 척추를 꺾는다. (의종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그는 껄껄 웃기까지 했다. (부관인) 박존위가 의종의 시체를 이불에 싸 가마솥 두 개와 함께 묶어서 연못 가운데로 던져 넣었다. …헤엄질을 잘하는 이 절의 승려가 가마솥만 건져내고 시체는 버렸다. 시체가 여러 날 동안 물가에 떠올라도 물고기나 새들이 뜯어먹지 않았다. 전 부호장 필인(弼仁) 등이 몰래 관을 마련해 물가에 묻어 주었다. 이의민은 스스로 공을 내세워 대장군(大將軍:종3품) 벼슬을 받았다.”(『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의종 허리 꺾어 곤원사 연못에 던져 출처 : 중앙SUNDAY 기사보도 2013.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