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태평양전쟁 한인 ‘포로감시원’ 전범처리 억울했다 /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심포지움

2004년 03월 25일 (목) 23:05



[한겨레] 태평양 전쟁에 포로 감시원으로 강제징용된 한인청년들이 지극히 형식적인 재판절차와 일제의 교묘한 책임전가 등으로 억울하게 전범으로 처벌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채영묵 국민대 연구교수는 국민대 한국학연구소가 26일 오전 10시 이 학교 본부관 3층 대회의실에서 ‘해방 후 해외 한인의 귀환과 정착’을 주제로 여는 학술심포지엄에서 ‘한인 포로감시원에 대한 B·C급 전범처리와 문제점’을 발표한다. 당시 전범재판기록 등을 토대로 포로감시원 문제에 실증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논문이다.





채 교수에 따르면, 일제의 침략전쟁에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된 한인 청년들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고학력 소유자이거나 지도급 인사였으나 당연히 숙지해야할 제네바조약은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애초에 제네바조약을 준수하려는 생각조차 없었던 일본은 국제적 문제가 될 만한 포로감시원의 임무를 일본인이 아닌 식민지국인 한국과 대만의 청년을 뽑아 수행시켰”기 때문이다.



전범재판 과정에서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은 연합국 포로들에게 손가락으로 지목당하기만 하면 곧바로 전범으로 기소됐으며, 재판 과정에서도 일본군이 연합국 포로들에게 저지른 잔혹행위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아야했다. 실제로 일제 수뇌부는 단 28명이 A급 전범으로 기소돼 이 중 7명만이 사형을 당한 반면, 동남아에 끌려갔던 한인 포로감시원들은 129명이 B·C급 전범으로 기소돼 22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채 교수는 “전범재판이 한인 포로감시원에게 불리하게 작용되도록 유도되고 조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이를 입증하는 사례로 △현지에서 유행한 ‘잔인한 행위를 한 사람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소문 △‘포로학대는 코리안부대가 했다’는 일본군 선전방송 사실을 증언한 기밀서류를 들었다.



박민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해방 후 관동군 출신 한인의 귀환’ 과정을 검토했다. 그는 “일제 말기 관동군에 소속된 한인은 약 2만~3만 명 정도이며, 이 중 소련군에게 포로가 된 1만여명을 제외한 1만~2만 명이 개인 자격으로 귀환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특히 박정희·정일권·채병덕·이종찬·김정렬·정래혁 등 관동군 장교 출신 인물들의 해방 직후 만주에서의 활동과 귀환 후 한국 군부와 정계를 장악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예컨대 “정일권이 200여 명의 관동군 출신 한인들을 모아 창춘에서 조선군간부훈련소라는 사설 무장단체를 만들어 교민보호 및 귀환준비를 했으며, 이를 토대로 이한림, 원용덕 등과 협력해 교문보안대라는 자위단체를 조직했다"는 것이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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