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 서평 / 김수영(국제)교수
[동아일보 2004-10-01 17:16]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근대 중국의 해석/프라센지트 두아라 지음 문명기 손승희 옮김/373쪽 2만원 삼인


요즘처럼 역사 문제가 한국 사회의 주된 화제로 떠오른 적도 드물 것이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친일행위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둘러싸고 정치권에서 공방을 벌이는 동안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해석을 내놓으며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게다가 거대한 이웃나라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자국 소수민족의 역사로 조작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한국 사회 전체가 갑자기 고대사 열기로 달아오른 양상이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역사 열기를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역사와 민족주의가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있는지 알 수 있다. 시카고대 사학과 교수로 미국의 중국사학계를 대표하는 저자가 중국근대사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지은 이 책은 민족주의와 역사 문제를 둘러싼 이러한 갈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통찰력을 제시한다.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라는 책의 제목에서 저자의 의도는 이미 명확히 드러난다. 바로 역사를 민족(국민국가)의 틀 밖으로 구출해내는 것이다. ‘역사’는 민족주의를 형성해냄으로써 국민국가 건설의 핵심적 도구가 됐으며, 이러한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역사’가 택한 방식이 단선적 역사서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단선적 역사는 국민국가의 형식으로 민족을 통합하는 근대적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다른 대안적 근대의 모습을 타자화하고 이들을 파괴하거나 획일화하거나 폐쇄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는 작업은 바로 이러한 파괴와 폐쇄가 일어난 지점을 찾아내 대안적 근대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중국에서 ‘봉건’이라는 용어가 국민국가의 역사서술 속에서 어떻게 전유됐으며 그 용어에 함유됐던 대안적 근대성이 어떻게 폐쇄됐는지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봉건이란 개념 속에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인 사회라는 의미가 내재돼 있었다. 그러나 이는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담론에 의해 보수적이고 파괴해야 할 전근대적인 것의 상징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민족주의를 근대성의 산물로 여기는 인식에도 정면으로 반대한다. 단일한 의식에 기반을 둔 집단적 주체로서의 민족이란 개념이 근대에만 존재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근대사회이건 전통사회이건 개인과 집단은 동시에 여러 공동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동일시가 정치화하면 언제든 근대적인 민족 정체성과 유사한 모습을 띨 수 있다는 설명이다.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주장의 저변에는 단합된 주체라는 정치적 자각이 오직 근대에서만이 가능하다는 계몽주의적 명제가 숨어 있다고 저자는 폭로한다. 결과적으로 근대 민족주의의 새로운 측면은 그 정치적 의식이 아니라 국민국가 단위의 세계체제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는 것은 민족이 요구해 온 역사서술을 탈피함으로써 새로운 민족 개념을 찾아내는 일을 그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 오늘날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고구려 역사를 둘러싼 중국과 한국의 갈등 역시 ‘국민국가의 역사 만들기’가 그 갈등의 근원에 있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결국 이러한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이 책이 주는 지혜, 즉 민족으로부터 역사 구출하기에 동참해 봄 직도 하다.


원제 ‘Rescuing History from the Nation-Questioning Narratives of Modern China’(1995년).


김수영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중국 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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